롯님 @rod_above 글 커미션
폴 드 쉘레져 에튀드 Op1, No 2.
예준은 피아노 위에 올려진 빽빽한 악보를 한 번 흘끗 보고서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면서 건반 위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잡한 생각이 들 때는,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어려운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 좋았다. 정확한 건반을 정확한 박자에 맞춰 누르고, 곧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악보를 넘기는,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바로 그 순간만이 예준이 악몽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피아노를 부술 것처럼 폭발적으로 연주를 하던 예준은 결국 네 장 째의 악보를 넘기려다가 손이 삐끗했다. 한 번 박자를 놓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성이 풀리는 예준이었지만, 아무래도 이 에튀드는 다시 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맥없이 팔랑팔랑 떨어지는악보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매일 아침 손을 풀기 위해 쳤다는 이 에튀드를, 예준도 몇 달째 치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가 ‘가볍게’ 친 것과는 달리, 예준은 자신을 이 곡 안에 쏟아내고 덜어내려는 목적으로 치는 것이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준은 결국 피아노 건반 위에 볼을 대고 천천히 엎드렸다. 건반이 한꺼번에 여러 개 눌리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예준은 그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볼을 떼고 비슷한 자리에 기댔다. 또 그 소리가 울렸다. 예준은 그린 것처럼 섬세한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예준의 고집 아닌 고집으로 피아노 연습실의 한 쪽 벽면은 통유리였는데, 그 유리로는 거의 완전히 복구가 된 낯설지만 익숙한 도시의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분명 열차에서는 별이 보였겠지. 예준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열차 안에서는 차마 밖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시가 모두 복구된 다음에서야 어두운 검은 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욕심에 찬 생각이라고, 예준은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예준이 욕심을 부린 것은 어두운 하늘의 별처럼 낭만적인 대상만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닿는 아버지의 시선, 주위의 인정, 그리고, 우치원….
치원에까지 예준의 생각이 닿자,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던 뺨을 떼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어린 시절의 치원이 어떤 피아노 곡을 즐겨 쳤는지, 예준은 이제 기억이 어렴풋했다. 내일 레슨 시간에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예준은 침실로 들어갔다. 아직 치원은 샤워를 끝내지 않았는지 방은 어두웠고 창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어색했다. 억지로 밝혀 놓은 조명과 불빛은 빛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그림자 같기만 했고 도시의 밤을 더 공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밤이 두려워. 예준은 침실에 누워 부드러운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려 덮으며 어린 아이처럼 생각했다. 평생 생각해본 적 없는, 잠에 대한 어색한 공포는 종종 예준을 덮쳤다. 열차 안에서라면 그 덜컹거리는 소리가 마치 짐승의 심장 박동 소리 같아서, 자신을 꿀꺽 집어삼키고 용해 시켜 버릴 짐승의 뱃속에 들어 앉은 것만 같아서 두렵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열차에서 내린 지도 벌써 계절이 몇 번이나 돌았다. 지금 예준이 누워 있는 침실은 끔찍하리만치 단단한 땅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준의 불안과 악몽은, 자신의 땅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할 때 시작되고는 했다. 예준은 언제나 세상과 인간, 그리고 예술에까지 일정 정도의 진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나는 그 음악 소리는 결국 피아노의 진동이었다. 예준은 자신의 존재가 흐릿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건반을 부술 것처럼 격정적으로 건반을 두드리고는 했다. 그것은 어린 치기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닿는 피아노의 건반만이 꼭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을 가진 무언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린 예준은 자신이 온 몸을 쏟아 붓는 것처럼 연주를 할 때, 멀리서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선이 어깨에 닿으면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아버지의 시선도 예준에게 진동을 주었다. 몸이 떨리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주는 이상한 시선이었다. 이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선과 진동. 예준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을 잇속으로 물고, 이불을 꽉 쥐었다. 침실이 떨리지 않는 대신, 예준의 몸이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떨렸다. 예준이 불안한 숨을 조금씩 겨우 뱉으려고 애를 쓸 때, 치원이 불쑥 침실로 들어왔다. 샤워를 끝낸 모양인지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맺혀 부드러운 벨벳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에 축축한 자국을 남겼다. 치원은 방금 마악 샤워를 끝낸 탓에 붉게 달아오른, 축축한 뺨을 한 채로 벽에 기대 서 나른한 목소리로 예준에게 물었다.
“불 끌까?”
“아, 응….”
예준이 그답지 않게 어리숙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치원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저 예준이 졸린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불을 껐다. 한 순간에 새카맣게 물든 침실에 치원이 눈을 느릿느릿 깜빡거리면서 침대로 다가왔다. 어둠에 눈이 겨우 익숙해지고 나서야 치원은 에준이 돌돌 만 이불 한 자락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예준은 치원이 눕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다. 치원은 베개 위에 수건을 깔고,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그대로 흩뿌린 채 누워 예준과 눈을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머리 말리고 자. 감기 걸려.”
무언가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처럼 예준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방 안은 어두웠고, 치원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귀찮아.”
“감기 걸린다니까.”
치원이 벌써 졸리다는 것처럼 손을 허공에 휘휘 젓자, 이불을 돌돌 말고 있던 예준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른 수건 한 장과 드라이기를 캐비닛에서 들고 와서는 익숙하게 치원을 일으켜 앉혔다. 치원은 귀찮다, 졸리다, 하고 웅얼거리면서도 예준이 하는 양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예준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치원의 머리카락을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드라이기를 틀어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다. 귀찮다고 할 때는 언제고, 예준의 손가락이 두피를 가볍게 스치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치원이 살짝 눈을 감았다. 치원은 예준의 손가락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친 탓에, 가락가락은 가늘고 곧으면서도 손가락 끝에만 단단하게 물집이 잡혀 있는 손. 치원은 예준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가 치는 쇼팽과 브람스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피아니스트들도 각기 그가 잘 연주하는 곡이 모두 돌랐다. 예준은 유독 쇼팽의 곡을 잘 연주했다.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은 쇼팽의 야상곡들도, 예준이 연주하기만 하면 꼭 그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처럼 들렸다. 슬프고 애달프면서도 열정적이고, 지독한 비밀을 숨긴 것처럼 양면적인 음색. 치원은 자신의 귓가에 뜨거운 바람이 닿지 않도록 동그랗게 모아 가져다 댄 예준의 손을 힐끗 곁눈질했다.
“…치원아.”
예준은 아주 조심스럽게 치원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드라이기 소리에 묻혀, 치원은 예준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치원은 그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예준의 손만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운명은, 치원이 이 손을 증오하도록 그를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예준과 치원의 관계처럼 불을 보듯 뻔한 관계라 해도 말이다. 치원은 자신의 귓가와 뺨을 감싸고 있는 예준의 손에서 다정함과 따뜻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예준이 어긋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아마도 치원은 그의 손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을 터였다. 아, 하나 있다면 예준이 여유롭게 쳐 내는 리스트의 피아노 곡 악보 정도일까. 그저 치원은 예준이 피아노를 치는 것이 좋았다. 순수한 동경의 마음이 컸다. 꺾이지 않는, 동글게 말린 예쁜 손등이 유려하게 피아노 위에서 움직이면 마법처럼 음악이 흘렀다. 함께 협주곡을 나눠 치며 웃던 때가 있었다. 치원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만약 예준이 지금처럼 다정한 손을 하고 있다면, 자신은 자신 인생에서 미소를 지을 줄 모르던 때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치원은 어렴풋하게 하고 있었다.
“됐어? 만져 봐.”
얼추 머리를 다 말린 모양인지 예준은 치원의 손을 가져가 그의 머리칼에 얹어 주었다. 치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예준은 편한 자세를 잡는 치원을 잠깐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도 정자세로 바르게 누웠다. 어두운 천장이 중력처럼 콱콱 내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에, 예준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고 해서 예준이 쉬이 잠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준이 밤이 두렵다고 생각한 것은 엄살이 아니었다. 눈꺼풀이 감기면, 검기만 했던 그 눈꺼풀 속의 세상에서는 다시 하얀 폭죽이 퍽 하고 불길한 소리와 함께 터졌다. 그 불꽃 사이에서 치원은 언제나 어리고 망가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만든, 자신이 그렇게 몰아낸, 그 어리숙한 모습. 그 모습의 치원은 자주 울고 있었다. 예준은 떨리는 손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울고 있는 어린 치원을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예준이 가까이만 다가서면 예준의 무릎께까지 오던 아이가 갑자기 불쑥 자라나서는 싸늘하고 냉정한 눈으로 예준을 내려다 보았다. 치원아, 하고 겨우 막힌 목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악몽 속의 치원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넌 내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어. 그 말을 듣고 나면 예준은 소스라치게 악몽에서 깨고는 했다. 그리고 나면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치원의 팔뚝이나 손목을 꽉 잡고, 그의 혈관이 떨리는 진동, 그리고 심장 박동 소리를 움키려고 애썼다. 점차 덜해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악몽을 꾸고 나면 예준은 불안했다. 굳센 땅과 바닥은 온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고 그리고 나면, 그리고 나면… 예준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치원은 자신의 손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래가 될 지도 몰랐다. 예준은 언제나, 이 악몽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치원에게 결국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아무리 자격이 없다고 힐난을 받아도 그 치원에게도 치원아, 하고 그의 이름을 실어 부르고 싶었다. 예준은 눈을 꼭 감고, 편안하게 잠든 치원의 옆 얼굴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내 악몽의 원인이자 내 구원의 문턱. 예준은 치원의 가슴팍이 평화롭게 부풀었다 꺼지는 것을 눈으로 훑었다. 만약 악몽으로 인한 불면과 불안의 댓가로 이 평화로운 진동을 느낄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로,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