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네님 글
뒤돌아보아야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직시하기 위해 발버둥 쳤을 적에는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하다가, 마침내 관심을 끊어내고 나서야 피할 수도 없도록 이목을 끄는. 오 년 전의 도련님이 온갖 폭언과 모욕을 일삼으면서도 단 한 번의 폭력조차 행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 혹은, 가정교사에게는 과분할 수준의 식사와 방이 제공된 이유 따위의…….
이러한 깨달음은 전혀 유쾌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최악이 아닌 차악이었다고 해서, 실은 제가 모르는 사이 제 편의가 아주 조금 살펴졌다고 해서 반드시 기뻐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잘 길들여진 개 같은 꼴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높으신 분들에게 고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고용 관계가 인격적인 서열까지 정해주지는 않으므로. 내가 그 치들한테 뒤지는 점이 무엇이지? 그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돈이 조금 많고 지위가 더 높다고 한들 결국 본질은 추잡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늦은 직시는 어떠한 감회 정도는 가져다주기 마련이었다. 이 저택에 들어온 뒤로 이따금 느껴 온 기분. 그 익숙한……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 버렸을 때의 불쾌감.
아니, 이는 전부 지나간 이야기다.
사랑이 사람을 약자로 만든다는 문장을 라엘 메이어스는 나름 기꺼워하는 편이었다. 그 정언대로라면 라엘 메이어스는 딜런 베드포트에게 있어 영원한 포식자일 테니. 적선하듯 던져진 동정으로 인해 살아난 목숨을 라엘은 우스워했지만 굳이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어린 도련님. 덜 자라 남의 이목에 관심을 둘 리 없는, 낡고 거창한 저택의 주인. 그 맹목적인 애정을 애써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라엘은 삶을 어려이 살아왔기에 쉬운 길을 찾는 법 또한 알았다. 저를 버리지 말라 붙잡는 딜런에게 라엘이 할 말은 고로 정해져 있었다.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베드포트 도련님. 만면에 오롯한 미소를 띤 채 내뱉은 답은 차라리 명령에 가까웠다. 딜런 베드포트는 그제야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손등 위에 닿는 패자의 입술은 버석하리만치 건조하다. 그에 나직한 웃음이 흘렀던가. 나쁘지 않다고 라엘은 읊조렸다. 손에 쥐어진 견고한 목줄이 퍽 기꺼웠다.
저택에서의 생활은 고여 있는 물 같았다. 평생을 격류처럼 보내 왔던 라엘에게는 꽤나 마음에 드는 고요함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음으로부터는 벗어났다지만 딜런은 여전히 기침과 통증을 앓고 지냈다. 한 번 상한 건강은 아무래도 쉽게 돌아오질 않나 보지. 기침 소리가 거슬린 라엘이 쯧, 혀를 찼다. 의사라도 부르지 그러나. 썩어나도록 많은 돈은 대체 어디에 쓰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마지막 날 하녀장이 실종된 이후,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는 딜런에게 라엘이 협박에 가까운 건의를 하고서야 딜런은 어디선가 침묵에 능숙한 이들을 데려왔다. 그래 봤자 고용인은 단 세 명에, 정작 주인의 방은 장식품 하나 없이 휑하다. 라엘의 취향에 맞춰 정원이고 저택 내부고 할 것 없이 다시 꾸며진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라 이따금은 위화감이 느껴지고는 했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희게 질린 딜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짐짓 여상한 얼굴을 했다. ……의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선생님. 이어진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라엘 메이어스는 그의 이면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그래야 당신이 나를 조금이라도 더 가엽게 여기지. 그야말로 한숨이 나올 법한 맹목이었다. 본인 몸이 망가지도록 내버려두면서까지 나의 관심을 끌고 싶다? 라엘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집착이다. 싫다는 꼬마를 기어이 의사에게 보일 정성 나부랭이는 없었으나, 그래, 짜증스럽게도 신경이 쓰이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딜런은 라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라엘과 딜런은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대신 그가 하는 것은 애걸이었다. 자신의 시야를 가능한 한 낮게 조아리고는 손만을 쳐드는 구걸이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꼴을 한 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는 신도처럼. 라엘은 언제든지 그 손길을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있어야만 했다. 분명 그래야 했을 텐데. ……여기에 있으니 나도 미쳐 가나 보군. 사랑에 돌아 버린 도련님과 사람이라기보단 정물에 가까운 시종들과…… 라엘 메이어스라. 자조적으로 내뱉어진 문장의 말미에는 진득한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라엘은 그 저녁에도 끈질긴 기침 소리를 들었다.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헛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않았다. 가지가지 한다는 감상만이 떠올랐다. 부모를 죽이는 꿈, 내쫓지 못한 그가 마침내 제물로 바쳐지는 꿈, 부모로 착각된 그의 목을 끝끝내 졸라 죽이는 꿈. 동정할 마음은 없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꿈에서라도 죽이니 아주 즐거웠겠어. 명백한 빈정거림에도 딜런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도련님은 시종일관 이런 태도였다.
“그날처럼…… 재워 주세요.”
“……하. 이제 혼자서는 자지도 못하는 다섯 살 어린애 흉내인가? 우리 작은 베드포트 도련님이 그 나이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
“부탁하는 입장이라면…….”
타박. 바닥에 구두 밑창이 닿는 소리가 났다. 한 걸음 나선 라엘이 짐짓 상냥한 손길로 딜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야지. 이윽고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저항하지 않는 몸은 큰 수고를 요하지 않고서도 점차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깨끗이 닦인 바닥에 정장으로 감싸인 무릎이 닿는다. 신께 기도를 올리는 듯한 자세의 딜런이, 라엘의 손바닥에 제 뺨을 대었다.
“선생님.”
반전된 고저는 어쩌면 달콤한 죄악일지 몰랐다. 라엘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떠한 온기도 없이 넓기만 한 방에 두 명 분의 호흡이 채워진다. 라엘은 직접 딜런의 방으로 걸음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정도 귀찮음은 ‘제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꺼림칙함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그가 그 방에 익숙해졌다는 반증이었지만, 라엘 메이어스는 저 자신의 변화로부터 기어이 눈을 돌렸다. 스스로가 알게 된다면 언젠가 저택의 주인 역시 눈치채게 된다. 안도한 듯, 기쁜 듯 웃음기로 일그러지는 그 앳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양을 할 거라면 있는 힘껏 추락해. 그래야 내가 너를 측은히 여기지. 우리에게 허락된 감정은 고작 그 정도 아닌가. 흐릿한 사고는 한낱 저주가 아니다. 정말로 그따위 파멸을 바랐다면 이런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묵묵히 견디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이따금 이 거대한 저택의 위장에서 느릿하게 소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하얀 건반처럼 창백한 손을 맞잡은 채.
다 큰 제자의 침대에 기대어 눕는 일에 새삼스러운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 평온함에 불쾌해지는 자신을 라엘은 눈치챈다. 아무것도 모르고, 혹은 모르는 척하며 제 쪽을 응시하는 한 쌍의 시선. 눈 밑이 거뭇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병자 같은 낯짝이었다. 내키지 않는 것을 참아 가며 기껏 와 주었더니 잠들려는 노력조차 보이질 않는군. 분에 넘치는, 대저택이라는 관짝에서 느는 것은 오로지 짜증이었다. 그 염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아직은 알고 싶지 않다. 날카로운 한숨을 내쉰 라엘이 곁을 돌아보았다.
“네 방에는 피아노가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내 제자의 영특한 머리가 그새 수명을 다한 건 아닐 테고.”
“…….”
“내 방으로 오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너를 재우고 나는 돌아갈 생각이니까.”
“그런 말 안 해요.”
선생님의 연주를 들으면 안심이 되어서, 정말 좋아하지만……. 가라앉고 갈라진 음성이 중얼거렸다. 그 새벽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모든 것을 잃은 치의 절박함은 이제 딜런에게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전부 받은 신자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 누구도 딜런을 다시금 절망하도록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라엘 메이어스를 제외하고는. 언뜻 머뭇거린 딜런 베드포트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하?”
“손을 잡아달라거나, 그런 요구는 싫어하실 테니까.”
말하자면, 곁에 있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라엘은 비웃음 같은 헛숨이 터지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도련님, 도련님 했더니 정말 도로 애가 되고 싶은 모양이야. 딜런 베드포트.”
“……그럴지도요.”
딜런은 부정하지 않았다. 라엘이 어떤 독설을 쏟아내든 아마 마찬가지였을 터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라엘이 천장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저택. 빌어먹을 베드포트 가문. 빌어먹을 딜런 베드포트! 이 나이를 먹고 다 큰 제자와 보모 놀이나 하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다. 잠깐 이를 갈다가, 라엘은 씹어뱉듯이 쏘아대었다.
“어린이를 위한 옛날 이야기 따위는 몰라. 무서워서 잠이 깰 만한 괴담이나 호사가들한테 들어둘 걸 그랬군.”
“…….”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한다면 그 즉시 내 방으로 돌아갈 테니, 눈이나 감도록.”
어쨌거나 승낙이었다. 그리고 딜런 베드포트는, 이것이 라엘 메이어스가 내어줄 법한 가장 최선의 호의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딜런이 차분히 눈을 감자 침묵이 흘렀다. 순간 같기도, 영원 같기도 한 적막이었다. 이윽고 그 어둠을 깨고 익숙한 음색이 흐른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자장가……. 아이를 안고 달랠 만한 부모님은 아니었으니 다른 누군가가 불러주었으려나. 변변찮은 가사도 없이, 허밍으로만 이루어진 곡조였지만…… 딜런은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끝이 보이지 않는 졸음기에 빠져들 수 있을 듯했다. 아침이 온다면 단 한 사람의 인력으로써 깨뜨려질 잠에.
딜런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라엘이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는 안락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서, 라엘은 그 밤을 싫어하기로 했다.
실로 견고하지 못한 결심이었다.